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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2010) / 차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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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국
기사입력 2020-09-06

▲ 문화의 수수께끼(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2010) / 차용국  © 강원경제신문

 

문화의 수수께끼(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2010)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마빈 해리스 미국 콜럼비아 대학 교수는 문화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 생산압력-->생산증강과정-->생태환경의 파괴고갈-->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이라는 도식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생태학적 적응양식을 통해 인간의 가족제도와 재산관계, 정치경제적 제도, 종교, 음식문화 등의 진화 또는 발전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문화는 인류 진화의 산물입니다. 인류는 지난한 진화를 통해서 자연적사회적 환경에 적응하며 유전하였습니다. 그 복잡하고 험난한 과정에서 이룩한 문화는 인류의 삶의 총체입니다. 그래서 세상만사 그 어느 것도 전혀 다른 두 분야의 전문지식으로 확연히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독립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자기만의 지식과 자기 방식만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합니다. 학자들이 자기 방식만 고집하게 된다면, 더 많은 것들을 밝힐 수 있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모르는 것이 많게 될 것입니다. 전문가들 사이의 의견 차이를 줄이고 기존의 이론에 집착한 여러 지식들을 종합하는 전략이 없다면, 다른 조사를 더 해보았자 생활양식들의 배경에 흐르는 원인들을 더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9). 선지식이나 신념과 이념의 벽 뒤에 가려있는 진실을 기꺼이 찾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류 문화의 생활양식 배경에 감추어 있는 원인들이 그토록 장시간 간과되어왔던 주된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답은 신밖에 모른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16). 여러 관습과 제도들이 그토록 신비스럽게 보였던 또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문화의 제현상들을 철저하게 물질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정신화'하여 설명하는 것에 보다 많은 가치를 두게끔 교육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17). 아주 기이하게 보이는 신앙들이나 관행들이라 해도 면밀히 검토해보면, 평범하고 진부하며 '통속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상황욕구활동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17). 이것을 인정하기란 불편하고 쉽지 않지만, 이것을 외면하면, 진리의 반쪽이 아니라 태초부터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생활양식들은 비실제적이고 초자연적인 조건들에 주의를 돌리게 하는 신화와 전설로 덮여 있습니다. 생활양식이 신화와 전설로 덮여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이 사회적 동질감과 사회 목적의식을 갖게 될 수는 있겠지만, 그로 말미암아 적나라한 사회적 삶의 진실들이 감추어져 있게 됩니다. 문화의 세속적인 원인들을 감추는 기만행위는 납덩이처럼 일반 사람들의 의식을 억누릅니다. 억눌러오는 이 짐을 벗어버리거나 없는 체하거나 지고 일어서거나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17). 대부분의 인간은 신격화된 의식의 지배를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 이유를 마빈 해리스는 무지, 공포, 갈등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나이 들고 죽어가는 일들을 잊으려는 단 한 가지 방어수단으로는 거짓의식이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18). 평범한 사회의 삶 속에는, 항상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지배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불공평한 현실들도 왜곡되고 신격화된다(18)는 것입니다. 무지와 공포와 갈등을 이용하여 예술과 정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회적 삶이 무엇인지를 이해 못하게 하는 작용을 하는 집단적 환상체계(collective dream work)를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의식은 스스로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일상생활의 의식은, 그 의식의 존재를 밝혀주는 사람들을 부인할 수 있는 개발된 능력 덕택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활양식에 직접 참가하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설명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18)는 함의입니다. 그래서 문화는 내부는 물론 외부의 시각으로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심각한 반론과 비난이 쏟아질 수 있겠지만, 문제를 제기하고 격론과 성찰과 반성은 진실을 찾아가는 고난의 여정일 수도 있습니다.

 

사례를 살펴봅니다. 먼저 인도의 암소숭배 사례입니다. 힌두교인들은 암소를 받들어 모실 만큼 숭배합니다. 암소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어머니인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인들에게는 암소가 삶의 모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힌두교인들에게는 암소를 죽이는 일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 없습니다(22). 암소숭배는 여러 면에서 인간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인도 정부기관은 마르고 여윈 암소를 무료로 기숙시키는 시설(소 양로원)을 운영합니다(22). 사람도 넘볼 수 없는 호강을 받는 듯합니다.

 

더욱 나쁜 것은, 암소숭배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서로 증오하고 싸우고 죽이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싫어하지만 쇠고기는 먹습니다. 이로 인해 힌두교도들은 회교도들을 소 살해자라고 증오합니다. 인도 대륙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누어지기 전에는, 회교도들이 암소를 잡아먹는 것에 분노하여 유혈폭동들이 연례행사처럼 일어났습니다. 그 폭동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생생한 것은 30명이 죽고 170개의 회교도 부락이 문지방까지 뿌리가 뽑힐 정도로 초토화된 1917년 비하르(Bihar)의 폭동입니다. 이 폭동으로 말미암아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아주 악화되었습니다(23)

 

암소문제는 다수 힌두교도와 소수 회교도 사회의 문제에 그쳤던 것이 아니고, 의회내 다수당과 암소숭배를 지키는 극단주의 힌두교 소수당들 사이에도 폭동과 질서문란을 야기시키는 주요인이 되었습니다. 1966117일 화환으로 장식하고, 소 똥을 태워서 만든 흰 재를 바르고, 송가를 부르는 한 무리의 옷 벗은 성자들을 앞세운 12만 명의 폭도들이 하원의사당 앞에서 암소살해 반대 데모를 했습니다. 8명이 살해되고 48명이 부상당했습니다(24)

 

인도에 암소가 많지만 이에 비해 수소가 상대적으로 귀합니다. 암소들이 수없이 방황하고 있는데, 수소는 희귀하다니 그럴 수가 있을까? 인도에서는 수소와 물소가 논밭갈이에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24). 소는 쟁기질뿐만 아니라 우차용으로도 필요합니다. 인도의 모든 농촌의 교통수단은 주로 수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5). 인도의 수소는 수명이 다하는 최후의 일각까지도 일을 합니다(29). 수소가 별안간 병들게 되면, 가난한 농부는 자기 농토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병든 수소를 건강한 수소로 대체하지 못할 경우, 고리의 부채를 차용해야 합니다(25). 암소를 소유한 농부는 수소를 생산해낼 공장을 갖는 셈이 됩니다. 암소숭배를 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암소를 도살장에 넘기지 못하는 타당한 논리가 성립하게 됩니다(25). 이 마르고 여윈 암소는 고리대금업자에게 항거할 수 있는 최후적인 방어수단이 된다(28)는 의미입니다. 암소는 절체절명의 생존수단인 셈이었습니다.

 

소에 의지하는 인도의 농업을 트랙터와 같은 기계로 대체하는, 소위 농업현대화 주장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럴듯한 합리적 대안처럼 보이지만, 인도의 특정 상황을 간과하고 과소 평가한 서구적 책상머리 견해일 뿐입니다. 기계의 힘을 이용한 농업은 경작 면적의 대규모화와 농업인구의 축소 문제를 수반합니다. 농업의 기계화를 이루어 낸 미국의 농업인구는 전체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소수의 농부가 거대한 기업농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농업이 미국처럼 기계화 되면, 25천만 명의 실직농민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 것입니다. 이들에게 직업과 주택을 마련해주어야 하고, 학교와 공공기관 등 부수적인 시설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간과할 경우 상상할 수 없는 대혼란에 봉착할 것입니다.

 

생태론적인 분석에서 정설이 되고 있는 이론은, 공동체라는 유기적인 조직체는 평상의 조건들보다 오히려 극단의 조건들이 생길 때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 보통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살반대와 쇠고기의 식용 반대의 터부가 한발과 기아를 정기적으로 겪어야 하는 환경 속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고찰해보아야 합니다. 암소를 죽이는 것을 아주 불경하게 간주하는 감정은, 아마도 순간적인 욕구와 장기적인 생존조건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 발생하는 괴로운 갈등에서 연유된 것 같습니다. 신성한 상징적 의미와 거룩한 교리를 갖추고 있는 암소숭배는 인도 농부들을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지 않게 해줍니다(30). 모든 인간활동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사로잡는 신조나 교리가 이용될 필요가 있습니다(40). 암소숭배는 인간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낭비나 나태가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는 저에너지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지속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39)는 점입니다. 결국 인도인의 지속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강력한 통제가 필요할 것입니다. 세속적인 권력이나 제도와 윤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앙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거룩한 율법과 암소숭배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기아상태가 오래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때때로 소를 잡아먹고 싶어하는 유혹이 견딜 수 없이 커지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1967년의 <뉴욕 타임즈>에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습니다. ''비하르 지역에 밀어닥친 한발로 인해, 기아선상에 직면한 힌두교도들은 암소가 힌두교에서 신성한 숭배대상이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암소를 잡아먹고 있다(31)''.

 

그러나 이 기사는 사실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인도 사회를 더 깊이 관찰해보면, 암소들 가운데 대부분은 도살장에 가지 않아도 결국은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갑니다. 그 까닭은 인도의 전역에서는 최하층 카스트들이 죽은 암소를 처분할 권리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이유로 매년 2천만 마리의 소가 죽어가고 그 대부분이 죽은 고기처분자들인 최하층민의 입으로 들어간다(32)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인도인이며 가죽제품을 생산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죽은 소의 가죽을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암소숭배에도 불구하고 인도에는 대규모 가죽제품산업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결국 암소숭배는 신앙의 이면에서 인간의 목적을 위해 최후까지 착취당하는 암소의 어두운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유대교인과 이슬람교인의 돼지고기 금기 사례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레위기에서 야훼는 ''돼지는 불결한 동물이기 때문에 이를 먹거나 손을 대면 부정하게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로부터 1500년 후, 알라신은 그의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돼지는 이슬람교도에게도 역시 불결하고 부정한 동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돼지는 다른 동물보다 효과적으로 알곡이나 쭉정이들을 고농도 지방과 단백질로 바꾸는 동물이지만, 수백만의 유대인들과 수억의 회교도들은 아직도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여긴다(43)는 것입니다. 야훼나 알라와 같은 '수준 높은' 신들이 인류 대다수가 즐겨 먹는, 해롭지 않고 오히려 익살스러운 이 동물을 저주하는 귀찮은 일을 한 까닭은 무엇인가? 돼지가 자기의 배설물 위에서 뒹굴고 사람의 배설물까지 먹는 더러운 동물이기 때문인가? 그러나 외관이 불결한 것과 종교적 혐오감을 관련시키려는 것은 모순이 있습니다(44). 적어도 신까지 나서서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말을 할 정도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만한 절박한 위협이 존재했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얼까?

 

아브라함의 자손인 히브리인들이, 기원전 13세기 팔레스타인의 요르단 계곡을 정복하고 있던 시기에, 히브리인들은 거의가 소염소 등을 기르며 살아가는 유목민 생활을 했습니다. 돼지는 원래 숲지대와 그늘진 강둑에서 사는 동물입니다(49). 그러니 돼지는 원거리를 몰고 다니기가 어려운 동물입니다. 또한 돼지는 체온조절 능력을 잘 갖추지 못하여, 덥고 건조한 기후에는 신체구조적으로 잘 견뎌내지 못한다(50)는 점입니다. 영국 캠브리지의 동물생리학 농업조사국의 마운트(L. E. Mount)에 의하면 다 자란 돼지는 섭씨 37도가 넘는 기온과 직사광선 아래서는 죽고 맙니다. 요르단 계곡에서는 매년 여름이면 섭씨 43도가 넘는 날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일년 내내 태양광선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습니다(50). 돼지를 사육하고, 돼지고기를 즐겨 먹을만한 환경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중동지방에서 돼지는 희소성 자원인 셈입니다.

 

희소한 자원은 비쌉니다. 상당한 권력이나 재력이 있어야만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중동지방에서는 처음부터 돼지고기가 사치스러운 식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돼지고기는 즙이 많고 부드러우며, 기름기가 많은 귀한 식품입니다(51).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누구도 그 맛을 잊지 못할 맛이었습니다. 청정부지로 높아가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 하면 심각한 사회불안과 분열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통합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신앙의 힘입니다. 돼지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유혹이 크면 클수록 종교적 금기조치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51). 사람들의 유혹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그럴수록 야훼와 알라의 명령의 강도도 더했습니다. 소규모의 사육은 유혹만 크게 할 뿐입니다. 차라리 돼지고기의 식용을 전면 금지하는 것이, 중동지방의 문화와 자연의 생태계 및 사회통합을 깨뜨릴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신의 금지명령은 완벽한 생태학적 전략이었습니다(49).

 

그러면, 이제는 더이상 중동에서 살지 않는 유대인과 회교도들이 아직도 고대의 식사 율법을 지키고 있는 까닭은 모엇이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신앙적 금기는 사회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금기를 준수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한 특별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동질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53). 고향을 떠나 이국에서 살아가는 유대인과 회교도가 돼지고기를 금기하는 식사율법을 잘 지키는 것은 원초적 본향을 향한 그리움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화속에 숨겨져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인류가 살아온 신비로운 삶의 비밀번호를 해독하는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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