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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평전(김삼웅 지음, 2016) / 차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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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국
기사입력 2020-08-17

▲ 이회영 평전(김삼웅 지음, 2016) / 차용국  © 강원경제신문

 

이회영 평전(김삼웅 지음, 2016)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우당 이회영은 1867(고종 4)음력 317일 서울 저동(현 명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뒤편의 주차장과 명동성당 앞 일대가 그 집터입니다. 명동성당 부근에 서 있는 수령 150년 남짓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아버지가 심은 것이라 합니다(18). 삼한갑족 명문대가의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나 가통에 따라 한학을 수학했고, 시문과 서예, 그림, 음악, 전각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랐습니다. 19(1885)무렵부터는 이상설여준 등과 만나 교유하고, 신흥사에서 이들과 함께 합숙하면서 수학역사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습니다(20). 실로 신구를 넘나드는 다재다능한 지식과 재능의 형성기였습니다.

 

하지만, 이회영은 과거시험을 거부했습니다. 함께 수학한 이상설과 동생 이시영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지만 이회영은 학문에만 전념했습니다. 성리학의 통치이념이 지배하고 있는 조선의 관료조직에 들어가 안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사민(만민)이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자유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될 수 있는 사회입니다(28). 이회영은 봉건적 인습과 제도를 거부했습니다. 1906년 부친 사망 후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기도 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의 사상을 실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8971011,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습니다. 황제 칭호를 사용하고 청과의 전통적인 주종관계를 청산한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입니다. 하지만 날로 극심해지는 외세의 이권 침탈을 막아낼 국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태에서 칭제건원을 시행한다고 해서 자주독립국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회영은 의병전쟁을 지원하고 널리 인재를 모으며 동지를 규합하여 구국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사업을 시작하였다(31). 이회영의 구국운동 여정의 출발이었습니다.

 

1904, 이회영은 서울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 학감을 맡았습니다. 신채호, 이준, 이상설, 최남선, 이동녕, 이동휘, 노백린, 이상재, 주시경, 양기탁, 남궁억, 이승만, 김구 등 당시 젊은 지성인과 우국지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상동교회는 반일민족 구국운동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이회영이 있었습니다. 신민회의 조직에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으며(35), 을사늑약에 맞서 오적 척살운동을 벌이고(36), 헤이그 특사 파견을 기획하기도 했습니다(42). 신민회의 조직은 도산 안창호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이회영 등 상동교회 출신들의 작품이었습니다. 안창호는 1907120일경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도쿄를 거쳐 1907220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귀국한 지 한 달여 만에 당시의 상황에서 전국 유력인사들을 망라하는 거대한 단체를 조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49).

 

1910829일 조선은 망했습니다. 경술국치입니다. 신민회도 된서리를 맞았습니다. 19091026,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안창호이동휘유동열이종호김희선 등이 구속되고 나머지 간부들도 탄압을 당하여 사실상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었습니다(63). 191012, 이회영은 조선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형제들도 뜻을 같이 합니다. 이회영 일가는 집과 재산을 처분하였습니다. 명동의 집은 최남선에게 팔렸습니다. 대대로 물려온 고서도 그에게 주었습니다(64). 이회영 일가가 전 재산을 팔아 만든 돈이 약 40만 원이었습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 정도였으니, 40만 원이면 아주 큰돈입니다(65). 이회영 일가(자청한 해방노비 포함)60여 명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 '합니하'로 망명하였습니다.

 

합니하는 험한 지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곳에 정착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험준한 지역이기 때문에 일제의 손길이 미치기 쉽지 않아서 군사기지 마련과 양병에 적임지였습니다. 이회영의 망명은 구국을 위한 무장투쟁의 길이었습니다. 기꺼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리하여 만주의 첫 항일단체인 경학사가 설립되었습니다. 경학사 사장으로 이상룡을 추대하고, 이회영은 내무부장이 되었습니다. 경학사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를 했습니다. 이 밤공부는 군사훈련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경학사는 내부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교육기관이었습니다(77). 신흥강습소는 1913년 신흥중학으로 개칭하고, 31운동 뒤인 1919년 다시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였습니다. '신흥(新興)'은 신민회의 '()'자와 다시 일어난다의 '()'자를 딴 이름입니다. 신민회의 이상을 부활시켜 구국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함의입니다.

 

이회영은 '아나키즘 자유연합'을 이상적인 독립운동의 연대로 구상하였습니다. ''다 같이 자유로서 살자는 것''을 요체로 합니다. 이것은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안으로 제시했던 '자유연합적 독립운동지도부 구성과 맥을 같이합니다(161). 이회영은 베이징대학의 뤼신 교수와 러시아의 에로센코, 그리고 신채호 등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만인의 자유평등을 주장하고, 일체의 정치적 지배강권을 부인하고, 경제적으로는 사유재산, 강권적 공산을 배격하고, 윤리적으로 상호부조와 만인의 공영을 주장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주의입니다(170). 이회영은 단순히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었습니다.

 

19231월 분열된 상해임시정부는 통합을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습니다. 70여 독립운동 단체에서 1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했으나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19191110일 김원봉 등 13명이 의열단을 창단하여 일제의 주요 요인 암살 등의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은 19196월에 입학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고, 주요 대원도 이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특히 김원봉은 이회영을 깊이 존경하여 수차례 베이징을 방문하여 조언을 듣곤 하였습니다.

 

1931918일 일제는 자기들이 관할하는 만주철도를 스스로 파괴하고, 중국 측의 소행이라고 트집을 잡으며, 철도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워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결국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관동군을 투입하여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당시 이회영은 항일구국연맹 요원들과 '남화연맹'의 핵심인 흑색공포단을 백정기의 주거지에서 비밀리에 조직하여, 텬진에서 일본 기선과 일본 영사관의 폭파 의거 등을 감행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332). 이때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애국단원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일왕을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고(1932. 1. 8),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일본군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1932. 4. 29). 국내외적으로 그 반향은 엄청났습니다. 이회영은 만주로 돌아가 만주국과 관동군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고, 주요 기관을 폭파시키며, 와해된 만주의 독립운동 조직을 재건하기로 결심합니다.

 

이회영의 만주행은 생애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면서 '죽을 곳'을 찾는 것이었습니다(340). 이회영은 193211월 초 단신으로 상하이를 떠났습니다(346). 이후 이회영의 행적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자취가 없습니다(347). 19321117, 이회영의 딸 이규숙이 다롄의 경찰로부터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이회영은 뤼순의 감옥에서 고문으로 사망했고, 뤼순의 화장장에서 승천하였습니다. 이회영 연구가들은 이회영이 상하이를 떠나 일제에게 어떻게 체포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고, 뤼순감옥에서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증언과 자료가 부족할 뿐입니다. 이회영의 동지이자 아내인 이은숙은 그가 베이징을 떠나면서 보낸 마지막 편지를 받았을 뿐이고, 딸 이규숙이 선생의 시신에 맺혀있는 핏자국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일제는 이회영의 사인을 자결이라고만 할 뿐입니다.

 

진정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이끌린다'는 니체의 말이 있습니다. 이회영은 가족을 사랑하고 동지들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을 위하여 조국과 동지들과 가족과 헤어져야 했습니다(316). 이회영은 유언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사망 당시 이회영의 심경을 1927년 처형대에 선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나키스트 바르톨 로미오 반젠티가 당당하게 형장 집행관들에게 한 말로 대신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두 번 처형한다 해도 내가 올바로 살았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우당 이회영은 올바르게 살았습니다. 그의 일생은 그대로 감동입니다. 내가 보는 이회영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입니다. 졸시를 바칩니다.

 

저동의 책장에서 만났습니다

명문대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어도

스스로 모든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유를 실천하신 참 지식인을

 

뤼순의 감옥에서 헤어졌습니다

독립군 자금과

인재 양성에 평생을 바친 대가로

모진 고문과 협박을 받으면서도

올곧게 신념을 지키며 옥사한 우국지사를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매화가 피는 것은

아무리 암울한 시대라도

여명을 밝히는 샛별 같은 사람이 있다면

꺼진 역사의 등불도

다시 켤 수 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한 인간의 삶의 보폭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임은 인류애로 충만한 세상을 소망했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입니다

 

(차용국, 진정한 휴머니스트 - 우당 이회영 전문)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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